Yongwon Kim
ARTIST
시간 밖의 풍경 - 파동을 치대는 ( )들
<조주리(전시기획, 미술평론가)>
작가 김용원은 지난 10 여 년 간 붓과 먹, 종이로 이루어진 전통 산수의 세계로부터 멀어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작업의 쟁점과 표현 양식을 넓혀왔다. 물질성의 과잉과 정신문화의 쇠퇴,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변모해온 자연의 초상과 인간 삶의 위기를 좇아온 그의 시선과 유목적 삶의 방식은 여러 매체를 횡단하며 중층적인 작업을 추동해 온 동인이라 할 수 있다.
회화적 양식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김용원은 자신만의 구도 설정과 채색 실험을 통해 꽤 다양한 것들을 접합하고 중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령, 물감으로 침윤된 화면의 물성과 오려 붙인 것들의 병치, 재현된 자연의 빛과 전기적 광원의 교차, 사생을 통해 마주한 자연에 대한 인상과 재구성된 풍경의 왕복 같은 것이다. 실재와 관념이 교차하는 영역은 때로 평면 회화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삼차원의 공간 속에서 빛과 영상을 포함한 매체를 혼합하는 조각과 설치로 확장되어 왔다. 지속적인 양식적 변주와 실험, 매체의 혼합과 확장을 일궈온 작업의 기저에 오늘날 시각 문화의 일부로서 소비되고, 제도적으로 소비되는 전통 회화의 현대적 계승과 모색에 대한 자기 분투가 있다.
평면 작업으로부터 입체물의 제작자이자 공간을 다루는 설치 작가로 운신을 넓히고,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외형을 넓혀오는 동안 작가의 인식은 실재하는 ‘풍경’을 ‘재현’하는 작가의 숙명이 실은 대상을 그대로 화면에 퍼담아 올리는 기예이기 보다, 무엇을 풍경으로 규정하느냐의 문제와 시각적으로 관찰한 것 너머의/이후의 것을 어떻게 편집하고 직조하느냐의 동시대적 서사술에 있다는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고도화된 예술 노동에 기반한 김용원의 작업이 전시의 맥락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진지한 동행임에 틀림없다.
전시 ≪시간 밖의 풍경 - 파동을 치대는 ( ) 들≫(2024. 10.4 - 10.27) 은 올 한 해 동안 여수 장도에서 김용원이 바라보고, 귀기울이고, 몸으로 대면해온 시간의 굴곡을 그의 작업으로 기록하고, 증언하며, 또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사유하기를 제안한다. 작업과 전시를 매개삼아 김용원이 재편한 시공간의 서사는 작은 음각 드로잉에서부터 대규모 회화-설치, 다큐 영상과 프로젝션 매핑의 형태로 나뉘어 발산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일부를 연결하고 비추는 다겹의 구조를 지향한다. 이번 전시는 풍경을 주요한 심상으로 다루면서도, 이전에 비해 훨씬 구체적 지역 서사와 삶의 맥락을 작업에 개입시킴으로써 서사적 요소에 풍부함을 불어 넣는다.
그런 점에서, 올 한 해 여수에서 보낸 시간은 그간의 작업을 통해 지속해왔던 주제 의식과 양식적 특질을 잔존시켜면서도 보다 적극적인 견지에서의 지역 탐구와 작가 연구가 어떻게 확장되고, 작업으로 가시화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경우 ‘아티스트 레지던스'가 함의하는 바가 낯선 지역에서의 일시적 정주와 그 부산물로서 쌓인 것들에 대한 후일담이지만, 이곳 장도에서의 독특한 삶의 풍광과 낯선 조건들이 필시 작가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방인에서 경계인으로, 다시 내부인으로 파고 들어가고자 하는 동력을 제공하고 작업적인 변화를 견인했음에 분명해 보인다.
작가의 지속적 관심사는 자연과 풍경과 같은 가장 근원적인 것들로 압축되고 반복하여 회귀한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결국 그 속에서의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과 대립, 존재의 생멸에 깃든 복잡한 역동에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가령, 물질 문화의 번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곤 하는 물과 바람의 원시적 힘, 해양과 땅의 견고한 뼈대와 살결이 있다. 김용원의 시선은 대체로 견고해 보이는 자연의 초상 속에서도 미세한 균열과 위기의 징조, 밀려나고 지워지는 삶의 망실점으로 향한다. 때로, 작가적 사유는 억겁의 시간과 문명 단위로부터 다시 몇 해, 몇 주, 그리고 인지 불가능한 어떤 불투명한 순간으로 미분화되며 급진적 상상에 기반한 통합을 이뤄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관계항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바닷물의 높이 차, 즉 ‘물때’를 매일 경험하는 일은 미시적 순간 안에서도 자연을 비롯한 전 존재를 요동치게 하는 어떤 ‘파동’을 감지하고, 아주 작은 파동이 몰고오는 또 다른 광대한 변화점을 주시하게 한다.
전시의 주요한 서사로써 작동하는 작업 <물때 - Chronicles of the Tides>는 여수 안에서의 장도, 다시 작가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경계적 시공을 다룬 작업이다. 즉, 외부 세계와 절연된 시간을 강하게 의식하며 이를 일종의 작업의 공간적 조건으로 삼은 셈이다. ‘고립’속에서 발생하는 생산적 긴장감과 자유로움의 역설은 물에 갇힌 시공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파노라마 작업으로 가시화된다. 더불어, 장소 맥락을 강하게 반영하는 자연 속의 설치와 그에 대한 기록은 또 다른 전시 공간으로 옮겨 오면서, 장소에 대한 작가의 몰입 경험과 의미화의 과정을 다시금 또 다른 차원으로 이식해 온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오직 이곳에서만 한시적으로 가능한 일인데, 시공간적 조건이 작업을 지연시키는 방해요소가 아닌 긍정적 기회로써 모색되었다. 작업에 허락된 시간 동안 표면에 얇은 직물을 붙이고 이어나가고, 그 사이로 붓칠을 교차하여 너비와 깊이를 쌓아나가는 고유의 작업 방식이자, 이를 수행하는 작가의 퍼포먼스를 담아낸 아카이브 필름이기도 하다. 척력에 의해 높아졌다 낮아지는 물결에 투영된 것은 사회적 연결과 은둔 속에서 작동되는 작가 삶의 지형학이기도 한데, 이곳에서 경험한 일시적 고립과 그로 인한 발생한 생산적 긴장감이라는 역설을 드러낸다.
‘시간’과 ‘파동’은 이어질 ‘실향’의 해석과 함께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쇳말을 제공한다. 물때에 따라 고립되고 다시 연결되는 독특한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지역의 풍경과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작가적 질문으로 나아간 것이다. 관조적 대상으로서 주지했던 물결의 흐름과 운동성에 대한 관심은 이내 물을 둘러싼 비가시적 주체들의 역사성, 역사화 되기 어려운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전시를 이루는 또 다른 축에 <실향풍경>이 있는데, 보다 구체적인 사건과 삶의 단편을 담고 있다. 즉, 물의 역동을 통해 시간과 공간과 존재의 축을 고민하는 작업이 일종의 관조적 시선과 미적 대응을 내포하고 있다면 후반부의 작업은 장도라는 조그만 터를 배경으로 끊임없이 소실되고 밀려나는 현실적 위상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섬에 있던 옛 돌이 외부적 힘에 의해 버려지고, 이주하게 되고, 외부에서 유입된 장식용 돌로 대체되는 과정은 지난 시간 지역 내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존재들의 이주와 실향에 관한 꽤나 직설적인 비유다. 물과 달라서 돌, 암석 등은 움직임과 소실의 빈자리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자연적으로 유실되거나 강제로 이주당한 돌에 대한 관심은 곧 시정의 정책에 의해 말끔한 투어 스팟으로 변모한 장도의 모습과 한때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던 선주민과 이미 다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원래’의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착에서 비롯된다.
한편, 장도 주변에서 발견한 재료들을 그러모아 연출한 설치 작업 <잃어버린 풍경의 반영 - 파편의 연대기>는 진중한 기록이기 보다는 혼성의 풍경이자, 가상의 자연에 가깝다. 영상과 사운드를 투영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풍경은 시간 속에서 패이고 쓸려나간 자리를 애써 메꾸고 신비롭게 치장한 것이다. 도처에 가득한 세계의 파편을 줍고, 끊어진 이음매를 찾아 서로의 접면을 확인하고, 누락된 자리를 더듬으며, 기어이 무엇인가로 채워놓고자 하는 작가의 직능이 또 한 번 갱신되고, 강화되다. 사라져 가는 것을 붙들어 매고자 하는 선한 노력과 이미 소실된 것들을 가시적인 형태의 레플리카로 보존하고자 하는 작가적 상상력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밀려나고 지워지는 연약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과정 안에 끈질기게 기록하고, 3차원 상의 물질태로서 증언하고, 실향을 가속화하는 사회문화적 힘과 이를 둘러싼 여러 존재들이 발신하는 무수한 파동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시간 속의 풍경을 모아 또 다른 차원에서 이를 되살리고, 삭제하고, 다시 구축하는 동안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찰나에 깃든 광대한 시간의 깊이를 기억하며, 끊임없이 부서지고 흩어지서도 우리 앞에 되돌아오는 미세한 물의 입자가 지닌 끈질긴 삶의 생동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큰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파도 대신 그 곁의 잔잔한 파동을 지켜보는 일, 무엇이 그 파동을 일으키는지 관찰해 보는 일,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아주 천천히 멀어지는 돌의 일생을 상상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전시는 오늘 하루의 삶을 세차게 치대는 파동에 흔들리면서도, 어제와 내일의 시간을 끈질기게 이어 나가는 연약한 존재의 놀라운 강인함을 풍경으로, 풍경을 담은 화면으로, 화면을 담은 또 다른 풍경으로 되먹이고 드러낸다.
Time Lapse: 자연의 리듬으로 호흡하다
<박우찬(Park Woochan, 미술평론가)>
◼ 17세기 뉴턴은 우주를 수학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방대하고 질서정연한 기계로 묘사했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모든 행동에는 예측 가능한 반응이 있으며 물체는 명확한 원인과 결과의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뉴턴의 세계관은 우주가 무관심하고 의도, 목적 또는 공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뉴턴의 무정(無情)한 세계에서의 사건은 인간의 감정, 욕망 또는 내재된 의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단순히 힘과 물질 간의 상호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의 세계도 도덕적 고려나 연민 없이 가혹한 진화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무정한 세계이다. 그가 주장한 자연 선택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유기체만이 지속되는 생존의 과정으로 작동하는데 자원, 포식, 적자생존에 대한 경쟁이 종의 진화를 주도하는 세상이다. 다윈의 자연은 내재된 공정성이나 어떠한 친절함 없이 무관심하게 보이며, 삶과 죽음은 단순히 지속적인 순환의 일부일 뿐이다.
반면 김용원의 세계는 유정(有情)하다. 작가는 세상의 사건이나 관계, 경험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연의 가치와 생명체의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애쓴다. 작가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잔상과 흔적 등에서 삶과 세상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연과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김용원의 유정한 세계는 기계 법칙을 넘어서는 연민, 공감, 상호 연결성, 조화가 특징이다. 모든 것이 차가운 예측 가능성으로 작동하는 뉴턴과 다윈의 무정한 세계와는 달리 주관적인 경험, 감정, 연결을 존재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중요시한다. 이 관점에서 김용원의 자연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행동이나 의도에 반응할 수 있는 살아 있고 역동적인 시스템이다.
김용원의 이번 전시의 주제는 ‘자연의 리듬으로 호흡하다’이다. 자연의 리듬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이고 삶의 교향곡이다. 자연의 리듬은 계절의 변화, 조수의 밀물, 바람의 생성과 소멸 등 자연의 모든 측면에서 작용하고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장치이다.
자연의 리듬은 생명의 에너지이다. 꽃 한 송이의 성장부터 동물의 이동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부분이 세계의 자연 주기에 맞춰 흘러간다. 자연의 리듬은 낮과 밤, 계절의 전환, 달의 위상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의 모든 것을 유지시켜주는 지구의 맥박이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생명은 탄생, 성장, 쇠퇴, 갱신의 패턴을 따른다. 지구의 리듬은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꽃을 피우고 쉬고 변화하도록 이끈다. 이 깊고 끊어지지 않은 리듬은 우리가 모두 같은 공동체의 일부임을 상기시켜준다.
◼ 김용원의 자연은 육안(肉眼)으로 본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육안(肉眼)과 심안(心眼)이 중첩되고 통합된 풍경이다.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복잡하다. 육안과 심안의 통합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육안은 세계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인식을 제공하여 관찰 가능한 현실에 기반을 제공하는 반면, 마음의 눈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해석 및 탐구, 시각화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과학 기술 뿐 아니라 사회, 예술에서도 격변의 시기였다. 20세기의 지적, 철학적 사고의 변화로 등장한 상대성, 다중적 관점, 현실의 파편화와 같은 개념들은 사람들의 인식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초, 입체주의는 다중적 관점, 동시적 표현, 전통적인 회화 공간의 해체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세상의 변화에 공명했다. 입체주의자들은 파편화되고,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세계를 표현하는 기법을 개발했는데, 그들이 개발한 대표적인 방법의 하나가 콜라주이다.
김용원은 기억과 경험, 문화적 요소가 우리 마음속에서 어떻게 혼합되고 변형되는지를 콜라주와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파편화된 세상을 종합적으로 표현한다.
“각각의 다른 시공간에서 마주한 자연들은 결국 내면이라는 또 다른 화폭 안에서 중첩되기 마련이다. 거주 지역에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특별하지만 때로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자연의 모습들은 가끔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기도 한다. 마주한 자연의 모습은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다양한 경험과 기억으로 혼재된 풍경의 조각들을 본인의 시각으로 잘라 붙여 표현하고자 한다
(작가의 글)”
빛과 물의 현상학, 내가 그리는 산수, 풍경, 어쩌면 이상향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가)>
처음엔 먹그림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락없는 먹그림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먹그림이 아니었다. 섬세하고 촘촘한 망 구조를 가진 실크 천을 배경 화면 삼아, 그 위에 좀 더 큰 망 구조를 가진 크고 작은 천 조각을 콜라주 해 놓은 것이었다. 짙고 엷은 색의 천 조각이 중첩되면서 먹그림의 농담을 대신하고 있었고, 하늘거리는 레이스의 끝자락과 천의 표면에 수놓아진 패턴이 어우러지면서 수목을 대신하고 있었고, 배경 화면 그대로의 실크 천이 하늘과 수면을,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안개와 여백을 대신하고 있었다.
때로 화면 아래쪽에 있는 물에 비친 반영 상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더 실감 나는 반영을 위해서 겹 구조가 도입된다. 투명 아크릴판과 판 사이에 화면을 고정해 만든 패널을 이중 삼중의 겹 구조로 마감한 것이다. 그러면 화면 속에 투명한 깊이가 생기는데, 마치 렌티큘러의 아날로그 버전을 보는 것 같고, 평면이면서 입체 같은, 평면 속에 입체가 담겨 있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준다. 그렇게 작가는 크고 작은, 촘촘하고 성근 망 구조의 천 조각을 재구성하고 중첩 시키는 방법으로 먹그림에서의 농담을 실현하고 있었고, 나아가 먹물이 종이 위로 스며들면서 번지는 선염법을 흉내 내고 있었다.
투명한 깊이라고 했다. 투명한 것은 빛에 반응하고, 투명한 깊이를 얻기 위해선 빛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화면 뒤쪽에 LED가 창작된 라이트 박스를 설치했다. 그렇게 마치 화면 뒤쪽에서, 화면 안쪽으로부터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효과를 연출했다. 원하는 분위기에 따라서 노란색 주조의, 빨간색 주조의, 청색 주조의 빛이 적용되지만, 어느 경우든 대개 부드럽고 은근한, 따뜻하고 온건한 빛의 질감이 느껴진다. 영락없는 먹그림 같은 실감 나는 화면과 함께 부드럽고 은근한 빛의 질감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결정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 작가가 유일하게 안료를 도입하고 적용한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때로 배경 화면으로 도입된 실크 천에 엷은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그렇다. 있는 듯 없는 듯 엷은 색이 투명한 빛을 투과시키면서 감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작가는 물에 비친 반영 상을 표현한다고 했다. 때로 반영 상은 천 조각으로 콜라주 한 화면에 흐르는 물의 이미지를 입힌 영상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오브제와 영상이 이중으로 콜라주 된 작업으로, 각 정지된 위쪽 화면과 흐르는 아래쪽 화면이 서로 대비되면서 어우러지는 작업으로 볼 수가 있겠고, 실제 풍경과 견주어 봐도 그런, 영락없는 실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도 작가는 그렇게 만든 다중화면으로 벽을 대신한 삼면의 방을 설치하고, 그 방 안에 관객을 들어 앉혔다. 그렇게 뒤쪽은 열려 있으므로 사실상 사방이 자연인 일종의 인공풍경 혹은 유사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작가는 관객의 실루엣이 그대로 화면 아래쪽에 맺히게 해서 관객을 화면의 그러므로 자연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킨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어떤 경험을 유도하는데, 자연에 대한 유사 체험으로 안내한다. 수동적인 관람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하는 능동적인 참여 주체로 전이시키는 것인데, 자신이 풍경의 한 부분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현장감과 함께, 마치 주체와 자연이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극적 효과를 준다. 스스로 침묵하는 자연,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자연의 증인이 되고 있다는 자의식과 함께, 자기가 유래한 원천(우주의 자궁?)으로서의 자연과 스스로 동일시하는 존재론적 경험을 추체험하게 만든다.
이 모든 일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유사 자연?)을 대면한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관념적이고, 관조적이고, 명상적이고, 내면적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에게 자연은 풍문으로나 떠돌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을 상실했다. 이런 상실의 시대에 소환된 자연이기에 그 울림이 더 크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화가들은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는 삶을 꿈꿨다. 말 그대로 꿈을 꾼 것인데, 자연을 들여올 수는 없으니, 대신 자연을 그림 속에 들어 앉힌 것이다(참고로 자연의 원형 그대로를 축소한 일본식 정원도 어느 정도 이런 대리 자연의 욕망과 관련이 깊고, 작가의 작업 역시 그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산수화는 어쩌면, 때로 실경에서마저도 사실은 저마다의 꿈을 그리고, 이상을 그리고, 욕망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실경산수(실경을 소재로 한)와 관념산수(자연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는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혼용된다. 진경산수도 마찬가지. 실재하는 풍경(산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마다 내면에 그리는 진정한 풍경(산수)을 뜻하기도 한다. 진정한 풍경? 이상향이고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알다시피 실재하지 않는 장소,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를 뜻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그릴 수밖에. 그렇게 저마다 내면에 그리는 진정한 풍경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지금도 유효하고, 더욱이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더 절실하다. 상실의 시대에 계속 꿈을 꾸게 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자연을,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어쩌면 존재가 유래한 우주의 자궁을, 존재론적 원형을 꿈꾸게 만든다.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산수는 이런 반복 상징이고 존재론적 원형일 수 있다. 존재론적 원형? 바로 도돌이표처럼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자기 회귀적 본능이고, 자기반성적 본성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결국 산수에 자기를 투사해보는 것이고, 산수를 통해 자기를 보는 그러므로 찾는 것이다. 산수 중에서도 산보다는 수 그러므로 물이 더 그렇다. 물은 알다시피 내면을 상징하고, 심연을 상징하고, 무의식을 상징하고, 자기를 비춰 보여주는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상징한다.
작가는 평면에서 모아레 효과를 통해, 그리고 영상에서 느리게 흐르는 물을 통해 이처럼 내면을 상징하는, 자기반성적인 거울에 해당하는 수면을 표현했다. 비단 같은 얇은 천이 겹쳐 있을 때 나타나는 물결무늬를 뜻하는 모아레 효과는 바탕화면으로 도입된 실크 천의 망 구조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치 그 자체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수면이 일렁이는 것도 같은 섬세하고 감각적인 느낌을 준다. 그렇게 흐르는 물을 보고 있으면 물과 함께 흐르는 자신이 보인다. 수면에 일렁이는 물결을 보고 있으면 저마다의 내가 보인다. 당신에게도 보이는가. 그 움직임이 너무 미미해서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외면이 아닌 내면에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를 넘어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파동과 공명을 통해서. 이로써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물을 매개로 저마다 자기 내면과 만나지는 자기반성적인 계기로 이끌고 있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는 아예 물을 매개로 한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내면적인 거울을 주제화한 공간설치작업을 선보이기도 하는데, 어둑한 방바닥에 수조를 설치하고 그 속에 물을 채웠다(무의식은 어둡고 내면은 고요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징검돌을 놓고 그 돌을 디디고 서서 마치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물속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리고 달처럼 둥근 화면을 수면에 던져놓았는데, 천 조각을 콜라주 한 화면에 일렁이는 물 영상을 덧입힌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물에 비친 달이라고 해도 좋을 그 영상에 저마다의 내면이 투사된다(월인천강 곧 천 개의 강에 달이 비치고 내가 비친다). 그렇게 저마다의 나는 내면에서 부는 바람의 소리를 듣고 공기의 질감을 감촉한다. 가만히 요람을 흔들어주던 자연의 손길을 기억하고,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 자연과 만난다.
그리고 공간설치작업은 내면(자기만의 방)을 상징하는 실내에서 외부 공간으로 확장되기도 하는데, 자연과 유사 자연(작가가 작품으로 조형한 자연)이 대비되면서 어우러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각 밤의 질감과 낮의 공기가 다른데,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작업은 은근한 빛의 질감을 내장하고 있어서 낮보다는 밤에 더 집중도가 높은 편이다. 그 자체 어둠을 밝히는 등의 역할과 함께, 마치 어둠 속에 부유하는 섬 같다.
그렇게 유사 자연에서 비롯한 작가의 작업은 무의식을 상징하는 흐르는 물로, 저마다의 내면을 상징하는 어두운 방으로,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대신한 달로, 그리고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섬으로,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메타포로 확장되고 변주된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이 정작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을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자연을 보는 유비적 상관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방증하는 대목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유비적 상관성은 평면보다는 설치작업에서 더 그런데, 아마도 자연을 통해 자기를 보고 싶은, 자연에 투사된 자신(자기_타자)과 대면하고 싶은 욕망이 평면에서 설치작업으로 확장하도록 추동했을 것이다.
자연을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내가 긴밀하게 만나지는 극적인 사건이다.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것과 자연에서 나에게로 건너오는 것이 충돌하면서 교감이 생기고 감동이 생긴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이 교감, 이 감동에 작가는 실체를 부여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내면을 건드리는 빛의, 바람의, 물의, 공기의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보통 한국화의 경우 대개 먹그림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먹그림에서 시작해 점차 오브제로, 영상으로, 그리고 공간 자체를 유사 자연으로 꾸민, 때로 장소 특정성이 강한 공간설치작업(장소가 결정적인, 장소와 운명을 같이 하는, 그러므로 장소가 없으면 작업도 없는)으로 확장해가기 마련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작가는 처음부터 오브제 작업에서 시작했다(물론 먹그림을 그린 습작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있었을 것이다). 촘촘하고 성근 구조의, 짙고 엷은 색의, 크고 작은 천 조각을 자르고 붙여 영락없는 먹그림 그대로를 재현했다. 실경 그대로를 빼닮았지만, 그림은 태생적으로 편집적이고 재구성적이었다. 천 조각 하나하나를 먹그림에서의 필이나 준이나 획에다 비유할 수가 있겠고, 그렇게 천 조각 하나하나를 모나드(단위원소) 삼아 나무를 이루고 산을 이루고 풍경을 이루고 그림을 이루었다. 그렇게 편집된 풍경을 이루고 재구성된 풍경을 일궈냈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픽셀은 유동적이다. 이처럼 유동화된 픽셀을 조작하고 조합하는 방법으로 실재하는 풍경은 물론이거니와 가상적인 풍경마저 눈앞의 현실로 불러올 수 있다. 그렇게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이 그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시절에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편집된 풍경, 재구성된 풍경은 뭔가 변화된 시대 감정에 부합하는 면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더욱이 작가의 작업은 이런 시대 감정을 하이테크놀로지가 아닌 로우테크놀로지로 구현한 것,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실현한 것, 그러므로 물성과 질료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어서 오히려 그 울림이 더 크고 감각적 쾌감도 더하는 편이다. 디지털적인 시대 감정을 아날로그적인 감각으로 풀어낸다는 역발상이 자기표현을 얻고, 또 다른 형식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수묵 산수화는 문인 사대부 계급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다. 가부장적인 시대 감정은 차치하고라도 남성 화가의 문기와 문향, 여기와 풍류의 소산이고 산물이었다. 여기에 작가는 어쩌면 여성적인 소재의 옷자락을 자르고 붙여 먹그림을 대신했다. 여기에 작가의 작업은 시각적임을 넘어 촉각적이기조차 하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는 어쩌면 여성적인 그리고 여성주의적인 성적 정체성과 감수성이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공교롭게도 자크 데리다 역시 전통적인 회화를 시각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로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촉각적인 언어를 제안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다시, 현대미술에서 온통 이런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인 언어표현이 다반사가 아닌가.
작가의 작업을 여성주의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적어도 그런 일면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어쩌면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산수화를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재해석하고 자기화해놓고 있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The Mountains and the water: Facing the surface of the boundary
Modern age’s landscape, the inner exposure
<Jay Yang _Curator, Theory of Art>
The trees from the fertile land shoots up against the lazy river to form the forest and the rugged mountain terrains with the rocks gathers together to draw the beautiful landscape. When the time stands still, the magnificent landscape is finally revealed above the surface of the water with the streamed moonlight. At the same time the boundary between reality and ideal is clearly obvious.
The new concepts with her unique interpretation regarding landscapes is based on the expansion of exposure area about ‘seen and unseen’ and that’s why the author could draw the beautiful landscape dazzling her eyes and the mind showing her inner side on the canvas.
There is no doubt that Kim, Yong-Won majored in Oriental painting is one of the finest authors in a black-and white painting area. As the tradition oriental landscape drawing has been contributing to the history of the ink-and-wash painting it can be expressed by the depth of ink and the painting capacity and we can get some glimpse of the reason why she chose the female’s lingeries as a painting material. As the modern arts’ uniqueness, like a Korean landscape painter, Kyumjae Jungseon(1676~1759)’ paintings, is expressed to overcome the current age, her material that gives a very similar expression of light and shade of ink could show freedom of expression. The opacity of the lingeries’ layers piled on silk is enough to replace the depth of the ink and the materials’ autonomy in terms of the form is suitable for describing the landscape painting.
With ‘Exposure’ as the center figure, Kim’s outlook has been expressed with the various angles and view points since 2012. This could be also compared to the clock which changes time due to the central axis and when you look inside we see the constructions of a minute hand and an hour hand differs as time flows while the clock doesn’t move at all as a form. Like the clock’s concept, Yongwon Kim gives a lot of effort on expressing temporal consciousness. <Mountain ; Exposure> introduced in 2013 and early 2014 is the foundation work that shows her view of the world including what works coming up next and is made by expressing of East Asia’s famous mountains and the magnificent landscape that was hard to see. <Inner Exposure> introduced in late 2014, on the other hand, Kim focuses more on the concepts unseen for her next work in 2015.
<Mountain, and Water…to Expose, The inner-boundary line> introduced in 2015, is the output for the last her 3 years work. This exhibitor doesn’t only show ‘the exposure of seen and unseen’ but also gives the message of something we’ve seen is not everything. The works before <Mountain, and Water…to Expose, The inner-boundary line> can be explained as the landscapes drawn by encountering face to face but <Mountain, and Water…to Expose, The inner-boundary line> completes this series by revealing the ideal covered by inner side and the reality with absence of the ideal which has to be expressed by not Kim’s eyes but the feeling and sense from her inner side.
Although the series showing the reinterpretation of Korean’s traditional landscape and the discovery of different view is completed, Yongwon Kim tells it is still continuous. Yongwon Kim’s intention- wants the audience to realize is that the exposure from the boundary of inner side – and the landscape is the part of the another process to the continuity with time axis. Therefore, this series still develops by the different point of each person’s view.
With the material based on the emotion of the Oriental painting derived from China, Kyumjae Jungseon developed his own unique paintings resulting in the foundation of Korean landscape. I am very confident that Yongwon Kim’s effort and the outputs should be the important examples for reinterpretating the modern oriental paintings.